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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문화유산 홍성의 역사인물 한용운

홍성의 위인 한용운
한용운
  • 호 : 만해
  • 생애 : 1879~1944
  • 주요활동 : 독립운동가, 시인,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요약정보 연보 생애와업적 주요사적지

만해 한용운은 1879년(고종16) 8월 29일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 잠방굴에서 청주한씨 서원군 한명보의 후손인 부친 한응준과 모친 온양방씨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릴 때 이름은 유천(裕天), 본명은 정옥(貞玉), 불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 (卍海, 혹은 萬海)라 한다. 6세부터 성곡리의 서당골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9세에 문리를 통달하여 신동이라 칭송이 자자하였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사찰령을 공포하여 우리나라의 불교를 일본불교에 예속시키고 사찰에 대한 권리를 장악하려 하자 반대운동을 벌였으며,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하여 불교계의 개혁을 주도하였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을 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하였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 수감 중 ‘독립의 서(獨立의 書)’를 썼다.

1926년 88편으로 된 ‘님의침묵’ 시집을 발간하였고 지조가 곧고 절개가 있어 일제와 추호의 타협도 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몸바치다가 1944년 6월 29일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별세하였다. 묘지는 서울 중랑구 망우동 정상에 부인유씨와 같이 쌍봉으로 안장되었다. 홍성군은 결성면 성곡리 한용운 생가지에 생가 복원에 이어 사당을 건립하였다.

연보

한용운 연보
1879. 8. 29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 한응준의 둘째아들로 출생.(乙卯, 음 7월 12일)
1884 향리의 사숙에서 한문을 배움. 서상기(西廂記)를 읽고, 통감, 서경기삼주를 통달함.
1892 향리에서 천안 전씨(全氏)와 결혼하다.
1896. 11 ~ 1897. 1 호론(湖論)의 영수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의 학통을 따르는 文人志士 김복한, 이설, 임한주 등이 일으킨 홍주의 을미 의거에 가담. 내포 지방에서는 을미 의거를 위한 모병을 일년 전부터 전개했음.
1897 홍주 의거가 실패로 돌아가자 고향을 떠나 출가,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백담사 등지를 전전함.
1899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의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다. 이때를 전후해서 세계여행을 계획하고 설악산에서 하산하여
불라다보스톡으로 건너갔으나 박해를 받고 곧 되돌아와 이곳저곳을 정처없이 전전함.
1904 시베리아, 만주를 주유하다가 봄에 다시 고향인 홍성으로 내려가 수개월간 머물다. 다시 출가함. 맏아들 보국 태어남. (12. 21)
1905. 1. 26 ~ 4 백담사에서 김연곡사(金蓮谷師)에게서 득도. 전영제사(全泳濟師)에 의하여 수계(受戒). 이학암사(李鶴庵師)에게 [기신론], [능엄경],[원각경]을 수료.
1907. 4. 15 강원도 건봉사에서 수선안거(최초의 禪수업)를 성취.
1908. 4 ~ 12. 10 강원도 유점사에서 서월화사(徐月華師)에게 [화엄경]을 수학 일본의 마관,궁도,경도,동경,일광 등지를 주유하며 신문물을 시찰. 淺田교수와 교유하여 유학 중이던 최린(崔麟)과도 사귀고 10월 귀국.건봉사 이학암사에서 [반야경]과 [화엄경]을 수료하다.서울에 경성 명진 측량강습소를 개설, 소장에 취임. (국토는 일제에 빼앗길지라도 개인 소유 및 사찰 소유의 토지를 수호하자는 이념 때문이었음).
1909. 7. 30 강원도 표훈사 불교강사에 취임.
1910. 9. 20 1910. 9. 20 경기도 장단군 화산강숙 강사에 취임. {조선 불교 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
1911. 3.15 ~ 3.16 박한영,진진웅,김종래,장금봉 등과 순천 송광사, 동래 범어사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한일불교동맹 조약 체결을 분쇄. 만주를 주유하면서 동북아 정세를 살펴봄. 범어사에서 조선 임제종 종무원을 설치하여 서무부장 취임 조선임제종 관장에 취임.
1912 경전을 대중화하기 위해 [불교대전] 편찬을 계획하고 경남 양산 통도사의 고려대장경 1,511부, 6,802권을 열람하기 시작.
1913. 5. 19 ~ 불교강연회 총재에 취임. 박한영·장금봉 등과 불교종무원을 창설, 통도사 불교강사에 취임.{조선불교 유신론}을 불교서관에서 발행.
1914. 4. 30 ~ 8 {불교대전}을 범어사에서 발행하다.조선불교회 회장으로 취임.
1915. 10 영남,호남지방의 사찰(내장사,화엄사,해인사,통도사,송광사,범어사,쌍계사,백양사,선암사 등)을 순례하며 곳곳에서 강연회를 열어 열변으로써 청중들을 감동시킴. 조선선종 중앙포교당 포교사에 취임.
1917. 4. 6 ~ 12. 3 {정선강의 채근담}을 신문관에서 발행. 밤 10시쯤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의정돈석(擬情頓釋)이 되어 진리를 깨침. [오도송] 남김.
1918. 9 ~ 12 서울 계동 43번지에서 월간지 [유심](惟心)을 창간하여 편집 겸 발행인됨(12월까지 3권을 발행하고 중단됨). 동지 창간호에 논설 [조선청년과 수양],[전로(前路)를 택하여 나아가라],[고통과 쾌락],[고학생]을 비롯하여 신체시를 탈피한 신시 [심](心)을 발표하다(일반적으로 신시의 선구를 주요한의 [불놀이]로 보지만 만해의 이[심]은 그보다 1년 앞서서 발표됨). 이때부터 더욱 문학 창작에 힘을 기울임. [마(魔)는 자조물(自造物)이다]를 [유심]지에 발표. [자아를 해탈하라],[천연(遷延)의 해(害)],[훼예](毁譽),[무용(無用)의 노심(勞心)], 수필[전가(前家)의 오동(梧桐)을 [유심]지에 발표. 중앙학림 강사에 취임.
1919. 1 ~ 8. 9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과 관련하여 최린,오세창 등과 조선독립을 숙의 3.1운동을 주도,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 수정을 하고 공약 삼장을 첨가. 경성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33인을 대표하여 독립선언 연설을 하고 투옥될 때에는 변호사,사식,보석을 거부할 것을 결의하고 거사 후에 일경에게 체포. 서대문 형무소에서 일본 검사의 심문에 대한 답변으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를 기초하여 제출. 경성지방법원 제 1형사부에서 유죄판결을 받음.
1920 투옥 중 일제가 3.1운동을 회개하는 참회서를 써내면 사면해주겠다고 회유했으나 이를 거부. 가을, 감형되어 출옥.
1922. 3. 24 ~ 10 법보회를 발기. 조선불교청년회 주최로 [철창철학]이라는 연제로 강연. 조선학생회 주최로 천도교 회관에서 [육바라밀]이라는 연재로 독립사상에 대한 강연.
1923. 2 ~ 4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적극 지원.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지원하는 강연에서 [자조]라는 연제로 청중을 감동시킴.
1924. 10. 24 장편소설 [죽음]을 탈고(미발표). 조선 불교청년회 총재에 취임. 이때를 전후하여 민중계몽과 불교대중화를 위해 일간신문의 발행을 구상했으며, 마침 시대일보가 운영난에 빠지자 이를 인수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1925. 6. 7 ~ 8. 29 오세암에서 {십현담주해}를 탈고. [님의 침묵] 탈고.
1926. 5. 15 ~ 2 {십현담주해}를 법보회에서 발행. 시집 {님의 침묵}을 회동서관에서 발행[가갸날에 대하여]를 동아일보에 발표.
1927. 1 ~ 8 신간회를 발기.신간회 중앙집행위원 겸 경성지회장에 뽑힘. 조선불교청년회의 체제를 개편하여 조선불교총동맹으로 개칭하고 제자들인 김상호,김법린,최범술 등과 일제의 불교 탄압에 맞서서 불교 대중화에 노력. 수필 [여성의 자각]을 동아일보에 발표. 회고담 [죽었다가 살아난 이야기]를 [별건곤]지에 발표. 동년 경성지회장 사임.
1928. 1 ~ 6 {건봉사 및 건봉사 말사 사적}을 편찬, 건봉사에서 발행. 수필 [천하명기 황진이]를 [별건곤]지에 발표. 논설 [전문지식을 갖추자]를 [별건곤]지에 발표.
1929. 11 광주학생의거를 조병옥,김병로,송진우,이인,이원혁,이관용,서정희 등과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고 민중대회를 염.
1930. 1 논설 [소작농민의 각오]를 [조선농민]지에 발표. 수필 [남 모르는 나의 아들]을 [별건곤]지에 발표.
1931. 6 ~ 12 {불교}지를 인수하여 불교사 사장으로 취임하고 많은 논설을 발표. 전북 전주 안심사에 보관되어 있던 한글 경판 원본(금강경, 원각경, 은중경, 및 유합, 천자문)을 발견 조사. [만화]를 7월부터 9월까지 [불교]지에 발표. 논설 [정교를 분립하라],[인도 불교운동의 편신](片信),[국보적 한글 경판의 발견 경로]를 [불교]지에 발표. 윤치호,신흥우 등과 나병 구제연구회를 조직하고 여수, 대구, 부산 등지에 간이수용소 설치를 결의함.
시론 [한갈등](閒葛藤)을 [불교]지에 발표하기시작.(다음해 9월에 끝냄).
논설 [중국불교의 현상],[조선불교의 개혁안],[불교개신에 대하여] 등을 [불교]지에 발표. [타이(의 불교]를 {불교}지에 발표. 시론 [중국혁명과 종교의 수난] 및 [우주의 인과율] 등을 {불교}지에 발표. 수필 [겨울 밤 나의 생활]을 {혜성}지에 발표하다. 김법린, 김상호, 이용조, 최범술 등이 조직한 청년승려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됨.
1932. 1 ~ 12 계선불교 대표인물 투표에서 최고득점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다(한용운 422표, 방한암 18표, 박한영 13표, 김태흡 8표, 이혼성 6표, 백용성 4표, 송종헌 3표, 백성욱 3표, 3표이하는 생략. [불교]지 93호에 발표됨). 수필 [평생 못 잊을 상처]를 조선일보에 발표. [원숭이와 불교]를 [불교]지에 발표. 논설 [선과 인생]을 [불교]지에 발표. [사법개정에 대하여],[세계종교계의 회고] 등을 [불교]지에발표. [신도의 불교사업은 어떠할까]를 [불교]지에 발표. [불교 신임간부에게]를 [불교]지에 발표.
[조선불교의 해외발전을 요망함]을 [불교]지에 발표. [신앙에 대하여],[교단의 권위를 확립하라]등을 [불교]지에 발표. [불교청년 운동에 대하여], 기행문 [해인사 순례기] 등을 [불교] 지에 발표.
[월명야에 일수시] (月明夜에 一首詩)를 [삼천리]지에 발표. 전주 안심사에서 발견한 한글 경판을 보각 인출(印出)하다(당시 총독부에서 인출비용을 대겠다고 제의해 왔으나 강경히 거절, 유지 고재현 등이 출연한 돈으로 간행하다). 이때를 전후하여 일제의 사족을 받은 식산은행이 일본화정책으로 조선 명사를 매수하기 위하여 선생에게 성북동 일대의 국유지를 주겠다고 했으나 이를 거절함.
1933. 1 ~10 유숙원씨와 재혼. 논설[불교사업의 개정방침을 실행하라] 및 [한글경 인출을 마치고]를 [불교]지에 발표하다. [현대 아메리카의 종교],[교정(敎政)연구회 창립에 대하여] 등을 [불교]지에 발표. [선과 자아],[신러시아의 종교운동] 등을 [불교]지에 발표. 수필 [시베리아 거쳐 서울로]를 [삼천리]지에 발표. [자립력행의 정신을 보급시키라]는 논설을 [신흥조선]지 창간호에 발표. 이때를 전후하여 [유마힐소설경]을 번역하기 시작. 이 해 벽산 스님이 집터를 기증하고, 방응모, 박광 등 몇 분의 성금으로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을 짓다. 이때 총독부돌집을 마주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짓도록 하였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1934. 9. 1 딸 영숙(英淑) 태어남.
1935. 3. ~ 4. 9 회고담 [북대륙의 하룻밤]을 조선일보에 발표. 장편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함. (다음해 2월 4일까지 연재함). 이때를 전후하여 대종교 교주 나철 유고집 간행을 추진하다.(미완성)
1936. 7. 16~ 10 장편소설 [후회]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다가 이 신문의 폐간으로 50회로써 중단됨. 단재 신채호의 묘비를 세우다(글씨는 오세창). 비용은 조선일보 에서 받은 원고료로 충당함. 정인보, 안재홍 등과 경성 공평동 태서관에서 다산 정약용의 서세(逝世) 백년기념회를 개최. 수필 [모종신범무아경](暮鐘晨梵無我境)을 [조광]지에 발표.
1937. 3. 1 ~ 12 재정난으로 휴간되었던 {불교}지를 속간하여 {신불교} 제 1집을 내다(논설'[불교] 속간에 대하여'를 발표). 소설 [철혈미인]을 [불교]신집에 연재(2호까지 연재하고 중단됨). 광복운동의 선구자 일송 김동삼이 옥사하자 유해를 심우장에 모셔다 오일장을 지냄. 논설 [조선불교 통제안]을 [불교] 신집에 발표함. [역경(譯經)의 급무]를 [불교] 신집에 발표. [주지 선거에 대하여], 수상 [심우장설] 등을 [불교] 신집에 발표.[선외선](禪外禪)을 [불교] 신집에 발표. [정진]을 [불교] 신집에 발표.
[불교] 신집에 연재하기 시작하다 (이듬해 9월까지). [제논의 비시부동론(飛矢不動論)과 승조(僧肇)의 물불천론(物不遷論)을 [신불교] 신집에 발표. 논설 [조선불교에 대한 과거 1년의 회고와 신년의 전망]을 [불교] 신집에 발표.
1938. 2 ~ 11 논설 [불교청년 운동을 부활하라]를 [불교] 신집에 발표. [공산주의적 반종교이상(反宗敎理想)을 [불교]신집에 발표. 장편소설 [박명](薄命)을 조선일보에 연재(이듬해 3월 12일까지 연재). 논설 [반종교 운동의 비판],[불교와 효행],[나찌스 독일의 종교]를 [불교] 신집에 발표.
[인내]를 [불교] 신집에 발표. [31본산회의를 전망함]을 [불교] 신집에 발표. [총본산 창설에 대한 재인식]을 [불교] 신집에 발표. 만당(卍黨) 당원들이 일제에 피검되자 더욱 감시를 받음. 이때를 전후하여 조선불교사를 정리하려는 구상의 일단으로 [불교와 고려제왕]이란 제명으로 연대별로 고려불교사의 자료를 정리 편찬하려고 자료를 뽑기 시작(미완성).
1939. 11 회갑을 맞아 박광,이원혁,장도환,김관호씨가 중심이 되어 서울 청량사에서 회갑연을 베풀다. 이때 오세창, 권동진, 홍명희, 이병우,안종원 등20여 명이 참석.(음, 7월 12일) 사흘 뒤 민족독립운동의 비밀집회장소인 경남 사천군 다솔사에서 김법린,최범술 등 몇 명의 동지와 후학들이 베푼 회갑 축하연에 참석하여 기념 시구를 함. {삼국지}를 번역하여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이듬해 8월 1일 중단됨).
1940. 2 ~ 5. 30 논설 [불교]의 과거와 미래]를 [불교] 신집에 발표. 수필 [명사십리]가 [반도산하](半島山河)에 수록되다. 창씨개명에 대하여 박광, 이동하 등과 반대운동을 벌임. 이때를 전후하여 [통도사사적]을 편찬하기 위하여 수백매의 자료를 수집(미완성).
1942 신백우, 박광, 최범술 등과 신채호선생 유고집을 간행하기로 결정하고 원고를 수집. 이때를 저후하여 {태교}(胎敎)를 번역 강의(프린트 본으로 간행하였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1943 조선인 학병의 출정을 반대.
1937. 3. 1 ~ 12 재정난으로 휴간되었던 {불교}지를 속간하여 {신불교} 제 1집을 내다(논설'[불교] 속간에 대하여'를 발표). 소설 [철혈미인]을 [불교]신집에 연재(2호까지 연재하고 중단됨). 광복운동의 선구자 일송 김동삼이 옥사하자 유해를 심우장에 모셔다 오일장을 지냄. 논설 [조선불교 통제안]을 [불교] 신집에 발표함. [역경(譯經)의 급무]를 [불교] 신집에 발표. [주지 선거에 대하여], 수상 [심우장설] 등을 [불교] 신집에 발표.[선외선](禪外禪)을 [불교] 신집에 발표. [정진]을 [불교] 신집에 발표.
[불교] 신집에 연재하기 시작하다 (이듬해 9월까지). [제논의 비시부동론(飛矢不動論)과 승조(僧肇)의 물불천론(物不遷論)을 [신불교] 신집에 발표. 논설 [조선불교에 대한 과거 1년의 회고와 신년의 전망]을 [불교] 신집에 발표.
1944. 6. 29(5. 9)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입적. 유해는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비한 후 망우리 공동 묘지에 안장. 세수 66. 법랍39.
1962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 수여

주요사적지

example
한용운선사 생가지
  • 지정사항 : 시도기념물 75호
  • 명칭 : 한용운선생생가지 (韓龍雲先生生家地)
  • 소재지 : 충남 홍성군 결성면 만해로318번길 83
  • 지정일 : 1989.12.29

승려이며 시인인 한용운(1879∼1944)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조그마한 비석 하나가 생가지임을 알리고 있다. 비석의 뒷면에는 '선생은 서기 1879년 청주후인 한응준의 2남으로 이곳에서 태어나셨다.

불교 지도자이시며 시인이신 선생은 기미독립운동 삼십삼인 대표의 일인이신 애국지사로 조국광복을 위해 민족 혼을 일깨우고 지도하다가 서기 1944년 6월 29일 향연 육십육세에 별세하시다'라는 내용의 간단한 약전이 기록되어 있다.

선생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으로 독립운동가로도 활동했으며 호는 만해(萬海)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체포되어 3년형을 받았다.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였던 신간회를 주도적으로 결성하였는데, 이 신간회는 후에 학생 의거와 전국적인 민족 운동으로 전개되고 추진되었다. 저서로 『님의침묵』, 『불교대전』 등을 남겼으며 그의 사후인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낮은 야산을 등진 양지 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생가가 쓰러져 없어진 것을 1992년에 복원하였다. 생가는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초가인데 양 옆으로 1칸을 달아내어 광과 헛간으로 사용하고 울타리는 싸리나무로 둘렀으며 바깥에 흙벽돌로 화장실을 만들었다. 이어 생가 좌측 뒷편에 사당과 삼문을 신축하였으며, 사당 전면에 기존에 있던 건물을 개축하여 관리사로 사용하고 있다.

example
한용운선사 동상
  • 공사착공년월일 : 1983년 9월 8일
  • 공사완료년월일 : 1985년 12월 2일
  • 건립단체 : 만해 한용운 선사 동상 설립 추진 위원회
  • 규모 : 면적 9.0㎡ 높이 302㎡ 둘레 9.0㎡
  • 사업비 : 155백만원 (도비 40, 시군비 25, 민자 90)

만해 한용운 선생의 훈업을 새시대 민족정신의 지표로 삼고 홍성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홍주혼의 구심점 강화를 목적으로 건립하였다. 한복 차림의 만해 한용운 동상은 왼손에 3·1독립 선언문을 들고 있고, 오른쪽 기단에는 만해의 애송시 〈님의 침묵〉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홍성버스터미널에서 광천방면 국도21호선을 따라 홍성경찰서 홍성교도소, 홍성기능대학을 지나 충령사 옆에 위치하고 있다.

담당부서 :
문화재
담당자 :
문광철
연락처 :
041-630-1256
만족도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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