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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張夏) 글의 상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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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장하(張夏)
부서명 전체관리자 연락처
등록일 2014-12-17 조회 1444
첨부
 
장하(張夏, 1316~1399)는 고려 개국공신인 태사충헌공(太師忠獻公) 장정필의 후손으로 전해지며, 고려 충숙왕 병진(丙辰)에 출생하였다. 공민왕조의 간관(諫官)으로 무신들의 횡포와 편조대사(遍照大師: 속명 辛旽)의 난정으로 나라가 어지러울 때 올바른 정치를 위해 간언을 서슴지 않았다. 결성장씨(結城張氏)를 탄생케 한 주역인 장하는 고려 공민왕 4년(1355)에 치러진 을미시에 동진사(同進士) 23인 중 한명으로 급제하였다. 장하(호는 淸溪)의 부친은 학림군수를 지낸 용문(用文)이고, 조부는 열(悅:내금위장)이요, 증조부는 갑(甲:결성 호장)이다. 장하는 과거 급제 후 공직에 나가 승승장구 했다. 1361년(공민왕10) 홍건적(紅巾賊)이 고려를 침입함에 문관이면서도 몸을 아끼지 않고 솔선수범하며 앞장서 난을 토평하고, 전의주부(典儀注溥)로 수복경성공신(收復京城功臣) 2등에 오르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고려 때 정3품 문관의 품계)에 책훈되었다. 1372년 6월에는 신돈 사후 그의 일파인 김문현의 무도함을 꾸짖어 과거 급제 동기인 이보림과 함께 탄핵하였다. 1378년 10월에 밀직부사(정3품)에 올랐으며, 1379년 7월에는 어명으로 최영과 함께 무도한 탐관오리인 양백연을 심문하였다. 1381년 5월 28일에는 개경의 큰 우물가에서 기우제를 지내 그날 비가 오자, 왕이 내구마를 하사하였다. 1382년 7월에는 산성순심사로 전국의 산성을 점검 보수케 하여 왜구의 침입에 대비했다. 1383년에 한성부윤(府尹)에 올랐으며, 이때 멀리 경상도 의성까지 가서 왜구를 격파하고, 일본인 간첩 3명을 생포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1386년 경에는 평양부윤으로 부임했다. 1388년 8월에는 경상도도관찰출척사(관찰사)에 나아가 공정한 농지측량으로 백성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했으며, 왜구의 겁탈에 맞서 싸우다 죽은 진주(晉州) 정만의 처 최씨를 정부에 상문하여 열녀로 표창케 했다. 1389년 9월에 문하평리(門下評理:문하부의 종2품)로 승진했다. 이씨조선 개국 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2품 벼슬, 재신 반열)에 올라 결성군(結城君)에 봉해졌다고 전한다(족보, 결성향지 참조). 그러나 이성계 세력이 장악한 조정에 크게 실망한 장하는 1390년(공양왕2) 8월 3일(양력 9월 11일)결성 박철동으로 낙향했다. 이미 고려의 국운이 다함을 알고, 개성에서 낙향하여 은둔한 것이다. 장하는 이곳 형산(衡山:저울산)에 평산서원을 지어 살면서 심관을 중요시한 교육으로 후학을 가르쳤다. 이때 큰아들 중노(仲魯)도 관직을 버리고 결성으로 돌아왔다. 조선 개국 후 여러 차례 조정으로부터 부름이 있었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죽음을 각오하고 응하지 않았다. 조선 정종 기묘년(己卯年, 1399) 졸(卒)하니 향년 84세였다. 장하의 묘는 충남 홍성군 서부면 중리(中里, 능동) 임좌원(壬坐原)에 있으며, 파주시가 2007년 건립한 고려통일대전(高麗統一大殿)에 고려충신으로 위패가 봉안되었다. 2009년에는 公의 일대기를 다룬『高麗충신 張夏평전』이 출간됐다. 청계공(淸溪公) 묘하(墓下)에는 통정대부행비서승(通政大夫行秘書丞) 겸 장례원장례 유인철이 찬한 비가 있다. 저서로 『청계집(淸溪集)』상·하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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