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메뉴 바로가기

구국/충의

문화유산 홍성문화자료실 인물 구국/충의

조헌(趙憲) 글의 상세내용
『 조헌(趙憲) 』글의 상세내용을 확인하는 표로 제목 , 부서명 , 등록일 , 조회 , 첨부 , 내용으로 나뉘어 설명합니다.
제목 조헌(趙憲)
부서명 전체관리자 연락처
등록일 2014-12-17 조회 1435
첨부
 
조헌은 백천인 조응지의 아들로서 자는 여식(汝式)이요, 호는 중봉(重峯)이라 하였다. 도원 이니 후율이니 하는 이름을 쓴 때도 있었으나 그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중종 39년 6월 28일 김포군 감정리에서 출생하였다. 5세 때에 마음 정자에서 여러 아 이들과 천자를 읽던 중 대빈행차(大賓行次)가 요란한 갈도성(喝道聲)을 내고 지나가자 글 읽 던 아이들이 모두 정자에서 내려가 그 광경을 보았다. 한 아이만이 글읽기에 열중하고 있어 지나가던 대빈이 길을 멈추고 그 아이를 불러 이유를 물었다. 아이는 아버지가 글 읽기에만 힘쓰라고 하셨다고 대답하였다. 대빈은 “우리나라에 또 하나의 학자가 나오겠다.” 고 하고 지나갔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연보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22세 때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2년이 지난 24세에 식년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정주, 파주. 홍 주에서 교수를 역임하였다. 31세에는 호조와 예조의 좌랑을 거쳐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통진현감에 있었다. 38세로부터 43세까지에는 공조좌랑, 전라도도사, 종묘서령, 보은현감을 지냈다. 43세에 공주 제독관으로 있을 때 이이와 성혼을 추죄하기 위하여 동인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려 파직을 당하였다. 원래 천성이 강직하고 정의감이 강한 그는 지방의 관직에 있 을 때에는 평범한 관리에 불과하였으나 조정으로 이임한 후에는 수많은 파란을 겪었다. 그 가 29세 때, 향실을 관리하는 교서관 정자로 있을 때에 왕의 불교행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하 여 관직에서 추방당한 것을 위시하여 여러 차례 과격한 상소를 하고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유배당하였다. 41세 때 보은현감으로 재임 중에 율곡이 타계하자 관직을 버리고 향리인 옥천으로 돌아가 서당을 지은 뒤 율곡을 추모하는 뜻에서 후율정사(後栗精舍)라하고 후배들을 양성하였다. 왜의 풍신수길이 사자를 보내 국교를 청하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와 동인들을 비난하는 상소 를 여러 차례 올렸다. 왕은 공의 상소를 보고 크게 노하여 불 사르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뜻을 굽히지 않고 도끼를 들고 대궐 앞에 나아가 조정을 비 난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올리다가 또 다시 길주 영동역으로 유배를 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유배지에서도 황윤길과 김성일을 왜국에 보내는 것이 부당하다는 상소를 하였다. 그는 정여 립이 머지 않아 모반할 것이라는 예언을 한 공으로 1년만에 석방되었으나 그는 신념을 굽히 지 않고 왜국에 갔던 통신사가 왜국의 사신과 같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또 다시 상소를 올려 왜사(倭使)를 처단했다. 국방에 주력하여 왜의 침공에 대비할 것을 주창하였으나 조정 백관과 왕은 그의 상소를 믿지 않고, 도리어 그를 한낱 광부(狂夫)로 몰았다. 이에 조헌은 궐문 앞에 엎드려 머리를 주춧돌에 부딪혀 유혈이 낭자했다. 장안 사람들도 미 친 사람으로 돌리니 그는 “명년에 피난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내 말이 생각이 날 것이다.” 하 고 탄식하며 돌아갔다. 선조 25년 4월 조헌의 예언대로 왜군이 우리나라에 상륙하여 북상하여 도성을 육박하자 선 조는 도성을 버린 채 의주파천을 하였고 사대부들은 남부여대하고 피난길에 여념이 없었 다. 그러나 조헌은 문하인인 이이, 김경백, 김승업 등과 공주에 나아가 각지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초모하자 이광윤, 장덕익, 신난수, 고경우 등이 각각 의병을 이끌고 달려오니 그 수 는 1700여명에 달하였다. 8월 1일 청주성 탈환 작전에 참가하여 승장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 병들과 같이 청주성을 탈환하는데 대 전과를 거두었다. 그 후 조헌은 의병을 이끌고 의주로 달려가 근왕할 결심을 하였으나 충청도 관찰사 윤각선 이 의병을 일으키는 것을 반대한 자기의 비행이 조정에 알려질 것을 두려워하며 금산작전 을 권고하여 의병을 이끌고 금산으로 향했다. 금산에는 왜장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이 지 휘하는 수만의 왜병이 호남을 공격하기 위하여 집결해 있었다. 조헌은 금산작전에 앞서 호 남순찰사 권율에게 글을 보내 8월18일을 기하여 공격할 것을 연락하였으나 권율은 기일을 연기하자는 회신을 보냈다. 그러나 조헌은 회신을 받지 못하고 금산에 도착하였다. 이때 왜 장이 수십 배가 넘는 대군으로 의병을 포위하니 조헌은 이곳이 죽을 곳이라 하고 말에서 내 려 북을 쳐 독전했다. 700의사들은 죽음을 다짐하고 적과 싸워 전원이 장렬한 죽음을 하였 다. 효종 기축년에 조정에서는 공에게 시호를 문렬이라 했다. 영의정으로 추증하는 한편, 고종 계미년에는 문묘에 배행하였고, 영조는 조헌의 후손을 적서의 구별이 없이 등용하라는 은총 을 베풀었다. 현재 중봉은 김포 우제서원을 위시하여 옥천의 표충사와, 황곡서원, 보은의 상현서원에 각 각 봉형되어 있다. 그는 율곡의 ‘기발리승일운설(氣發理乘一運設)’을 지지, 발전시킨 성리학 자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 重峯集 』『 重峯東還封事 』가 있고,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宣祖實錄』『 亂中雜記 』『 日沙集 』『 海東名臣錄 』등에서 볼 수 있다.

목록

게시판 이전 및 다음 링크 관광_구국충의의 이전글과 다음글을 보여주는 설명하는 표입니다.
다음
다음
담당부서 :
문화관광과
담당자 :
장용민
연락처 :
041-630-1690
팩스 :
041-630-4242
만족도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